#묵상으로여는아침 #이목사큐티 #10월18일 #월요일 #욥기 9:11-16
욥은 주님이 자신의 앞으로 지나가셔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아무도 막을 수도 물을 수도 없고, 진노를 돌아키지 아니하신다고 말한다. 자신이 의로울 지라도 대답할 수 없고, 오직 심판자에게 간구만 할 뿐이며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지 못한다고 말한다. 까닭없이 자신을 치시고, 상처를 주시는 분이 여호와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말한다.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간 것도 주님이 다 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욥기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욥의 절망은 주님을 볼 수 없고, 깨달을 수 없기에 생기는 것이다. 지금의 고통과 아픔이 왜 주님께서 허락하셨는지를 알수만 있다면 지금처럼 절망에 헤메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주신이도, 거두신 이도 주님이시라고 했던 고백은 지금의 고백과 비교해 보면, 이제 주님이 가져가셨으니 다시 자신에게 그 시절의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인생들의 마지막 계획을 멸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욥.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가게 놓아두신것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욥을 보면서 주님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 지를 깨닫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보고 싶어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그 이유들을 생각해 보면, 그 중심에 자신이 있는것을 보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내가 어떤 결정이 필요할 때, 그 결정으로 더 나은 나의 삶을 위한 것이 목적일 때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주님을 보고 싶고, 그분의 음성을 듣기 원하는 것은, 그분이 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실현시켜나가실 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은 것이 내 마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신앙생활의 이슈 중 하나가 아닐까?
정답은 너무 간단하지만, 실천은 너무 어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주님과의 친밀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주님과 얼마나 가까워져 있는가? 내 가족과 내 친한 친구보다 주님과 더 친하게 지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렇게 알고 있는 나 또한, 주님과의 친밀함을 생각하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더 주님을 찾고, 그분께 나아가는 모습이 너무 많이 있으니 말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의 대상으로만 보았을까? 그분과의 친밀함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주님이 내 곁에 계심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은혜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내 곁에 계시는데, 내가 깨닫지 못하여서 그분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과 더욱 시간을 많이 가지길 결단한다. 말씀을 읽으며, 기도를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분과의 관계를 끊지 않기로 결단한다.
사랑의 주님. 주님과의 관계를 일상속에서도 내 스스로 끊어버리지 않게 내 마음을 붙잡아 주세요. 지금도 역사하시는 보혜사 성령님과 친해질 수 있도록, 그래서 제가 주님이 앞으로 지나가실 때, 움직이실 때 마다 주님을 느끼고 깨달아, 당신이 인도하는 삶으로 살아가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