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목사큐티 #4월29일 #목요일 #출애굽기 10:21-29
이제 9번째 재앙인 흑암이 애굽에 임한다. 3일이라는 시간동안 애굽사람들은 서로 볼 수가 없게 되었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 이에 바로는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내겠다고 하면서, 또 딜을 해 보지만,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시행해야 한다고 말하니 바로의 마음이 다시 완악해지고, 모세에게 협박을한다. 하지만 모세는 바로를 다시 볼 일이 없을것을 예언하며 나간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흑암이 임하였을 때, 바로가 모세를 불렀다고 한다. 사실 말씀에는 사람들이 서로 볼 수도 없었는데, 어떻게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기 위해 찾을 수 있었을까?
바로가 이스라엘 땅으로 갔을까? 그건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바로의 궁전에서 불을 켰을까? 물론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말씀을 그대로 묵상을 해 보면, 흑암의 어둠은 서로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냥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모세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모세를 바로의 신하들이 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인 자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야 한다. 세상은 어둠으로 캄캄하여서, 서로의 죄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빛이 드러나기에 세상이 볼 수 있다.
나는 어떠한가?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빛을 비추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데 헌신하기 위해 목회의 길을 걷고 있는데, 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는가?
세상의 어둠에 함께 묻여있어서 죄를 죄로 보지 못하고, 좋은게 좋은것이라고 하면서 죄를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생활과 내가 전하는 말씀의 메시지를 돌아본다. 정말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빛이 드러나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정죄가 아니라,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에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빛인가?를 생각해 본다.
내 안에 빛이 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더 묵상을 해 보았다.
그는 모세와 이스라엘 지역에만 비춰진 빛을 보았을텐데도, 왜 어둠에 갇혀 있으려고 했을까?
바로의 딜이 모습속에 죄를 발견한다.
바로는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 중에, 일단 노예들인 이스라엘백성들은 보내주기로 하지만, 가축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했다. 욕심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바로의 욕심은 죄를 낳았다. 그렇기에 그는 죄의 흑암에서 절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것이다.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될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죄가 점점 커지게 되면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내 안에 빛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내 안에 어떤 욕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아야 함을 깨닫는다. 내가 세상속에서 놓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무엇으로 기뻐하는지, 무엇으로 걱정하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역시 아직까지 나는 물질에 많이 약하다는 것을 또 깨닫는다.
통장의 잔고에 마음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나의 모습속에 '바로'와 다를 것이 없음을 본다.
모든것이 주께로 부터 왔으니, 내것을 내것이라 이야기 할 필요도 없고,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채우시는 주님을 알고 있고, 그 말씀을 받고 왔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여전히 연약하고, 죄성으로 가득찬 나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지지 않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말씀으로 나를 또 깨워주신다.
주님 내 안에 소유욕으로 인한 죄를 가지고 살지 말게 하시고, 모든 것에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다른이들의 필요를 흘려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 빛되시 주님만 전해지게 하옵소서. 말씀을 전할 때에도, 죄에 머물러 죄만 묵상하는 자들을 깨울 수 있는 빛의 말씀만이 증거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말씀으로 깨워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